2015. 12. 27. 09:13ㆍ♣ 행복한 여행/국내여행
맛과 멋 그리고 충절의 고장 진주여행
충절의 도시 진주
부산에서 집으로 오는길에 진주를 경유해서 왔다. 예전에 익산에서 부산에 가려면 멀리 경부고속도로를 돌아서 가는 편이 부담스러워서 전주-남원-함양-진주-함안-김해를 거쳐 장장 6시간에 걸쳐 부산에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3시간반이면 부산에 도착한다. 그때 진주로 다니던 생각도 나고 최근에 주구장창으로 다니던 통영에 가던 길에 보았던 진주의 생각도 나던중 진주에 맛집으로 유명한 곳이 많다하여 일부러 방향을 바꾸어 들어왔다. 진주하면 장어외에 진주냉면, 그리고 얼마전 TV에서 방영된 뒤로더 유명해진 비빔밥집을 찾았다. 그런데 한군데도 가보지 못하고 돌아서야 하는 이발길이 너무 아쉽다. 찾아드는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아서 가뜩이나 도로여건이 불편한 진주에서 차를 댈수도 없거니와 장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불편함, 물론 여기까지 왔는데 그 것쯤이야 못참나하는 반문도 있겠지만 우리집엔 피자, 치킨, 파스타등에 익숙해진 아주 고집이 센 딸내미가 있으니... 길거리에서 허비한 시간을 그나마 위안을 삼은것이 진주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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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많은 침입을 받은 장소이고 또 굳건히 지켜왔던 진주성, 그래서 진주하면 충렬의 고장이라고 많이들 부른다. 조선시대의 3대대첩은 김시민의 진주대첩, 권율의 행주대첩, 이순신의 한산도대첩으로 큰 성과를 올린 전투중에 하나가 이곳 진주성 전투다.
진주성 내성의 북문이자 정문 '공북문'
(외성은 현재는 없어짐)
'공북’이란 충성을 맹세한 신하가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해 공손하게 예를 올린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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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김시민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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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성내에 촉석루 (矗石樓)는 한자 그대로 우뚝세워진 돌위에 세운루각이라는 뜻이다. 고려말 공민왕에 지어졌고 선비들이 풍류를 즐기던 장소이며 임진왜란등의 전쟁때에는 성을 지키는 지휘소로 활용한 장소라고 한다. 익히 알고 있지만 임진왜란때에 의암 논개가 적장과 함께 남강에 투신한 아픔의 장소이기도 하다.
진주가 고향인 고려말과 조선시대 정도전과 쌍벽을 이루었고 후에 이방원을 왕으로 올린 인물 하륜선생이 말하기를 이곳 진주성은 백문보 담암선생의 말과 당시 본인이 직접 보았던 것을 토대로 처음에는 촉석성으로 부르던 토성이었다가 후에 석성으로 고쳐 지었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矗石樓(촉석루)
白文寶(백문보).本貫:稷山(직산).字:和父(화부).號:淡庵(담암).
高麗後期(고려후기)의 文臣(문신)
=고려 충렬왕 29\년(1303∼1374)고려 공민왕 23년=.
登臨偏憶舊時遊(등임편억구시유) 루에 오르면 옛날에 놀든 때가 간절이 생각나고
强答江山更覓詩(강답강산경멱시) 굳이 강산에 답할 시를 다시금 찾아보네.
國豈無賢戡世亂(국기무현감세란) 이 나라에 난세를 칠 현인이 없었던가.
酒能撩我感年衰(주능료아감년쇠) 술이 나를 어지럽혀 늙음을 더 느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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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시를 가로지르는 유유한 남강의 모습이다. 촉석루의 모습을 찍기 위해서는 저 남강 반대편을 포인트로 삼아야 하는데 건너가지 못했던 것이 두고두고 아쉽다.
낙동강의 지류인 남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 물의 줄기가 하나는 지리산 운봉에서 흘러내려가고 하나는 남덕유산 서상의 기슭에서 발원하는 것으로 말한다. 지리산 둘레길 1코스 노치마을을 예전에 말한적이 있다. 이 노치마을에서 서쪽으로 흘러가는 물은 남원 구룡폭포와 육모정을 거쳐 섬진강과 합류하고 동쪽으로 흐르는 물은 뱀사골, 달궁에서 흐르는 물과 만나 엄천강, 경호강과 합류하여 흐르다 남강과 합류하여 진양호를 거쳐 낙동강으로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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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석루의 또다른 이름 남장대라는 문구가 루의 안쪽 천정현판에 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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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바위위로 건너가지 말라는 위험문구가 앞에 써있다. 보기에는 건너갔다 왔다하는 것이 별거 아닌 것 처럼 보이지만 저 바위아래가 꽤 깊은 곳인가 보다. 위험하다고 거듭 강조해놓았으니 호기심에 저 바위로 건너가서 사진을 찍으면 더욱 좋은 포인트가 될 것 같아 건너갔다 오려고 했더니만 아들 녀석이 한사코 내팔을 잡고 안놓아준다. 하기야 논개도 적장을 껴않고 투신할 정도니 그 깊이가 깊은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아무튼 아들 녀석이 제아비가 혹시 잘못되는 것은 되게 걱정이 되는 가 보다.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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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석루를 내려가 남강의 절벽에는 임진왜란시 '게야무라 로쿠스케'라는 적장과 함께 투신한 의로운 행동을 하는 논개를 기리는 '의암논개지문'라는 조그만 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원래는 위험한 바위지대라는 위암으로 부르다가 이를 계기로 의암으로 바꿔어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논개가 관기의 신분이었다고 알려진 것도 있는데 논개는 전북장수에서 몰락한 양반의 출신으로 자신을 옥사에서 올바른 판결로 구해준 장수현감 최경회의 부실(첩)이었다. 임진왜란이 발생후 많은 곳에서 최경회를 내조하면서 전쟁터를 따라 다니다가 이곳 진주성에서 순국한 최경회의 한을 풀고자 신분을 속이고 위장잠입하여 적장과 함께 투신한 의로운 행동을 한 인물이다. 기생으로만 기록에 전하고 있다가 최경회의 해주최씨의 문중에서 발간한 '의일휴당실기'편에 논개가 최경회의 부실(첩)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기생이 아니었다는 그 사실이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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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서 뭐하시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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